페이지 정보
작성자 부산의아름다운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8-22 17:19 조회365회 댓글0건본문
#노을갈맷길걷기 7-3구간 20220818
수안역 ~ 장관청 ~ 송공단 ~
동래부동헌 ~ 박차정의사 생가 ~ 충렬사 ~ 인생문~ 복천동고분 ~
북장대 ~ 북문 ~ 서장대 ~ 동래향교
약 7km
수안역사 내부..
2017년 출발지였던 동래구청에서 접근성과
역사 갈맷길의 내용을 한곳에 모아둔 전국 유일의 역사 내 박물관,
지하철4호선 수안역에 위차한, '동래읍성 임진왜란 박물관' 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조정이 되었습니다.
내부가.원형광장태로 되어 있으며 넓직합니다.
2017년 출발지였던 동래구청에서 접근성과
역사 갈맷길의 내용을 한곳에 모아둔 전국 유일의 역사 내 박물관,
지하철4호선 수안역에 위차한, '동래읍성 임진왜란 박물관' 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조정이 되었습니다.
내부가.원형광장태로 되어 있으며 넓직합니다.
수안역 내부.원형광장태로 되어있으며 대각선으로 각 출구들이 있습니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해자 건설에 대한 설명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
.
역사갈맷길 7-3구간 첫번째는
박물관 관람부터 시작합니다.
박물관 관람부터 시작합니다.
.
지하철4호선 수안역 5번 출구로 진행합니다.
역사 갈맷길 두번째는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인 장관청입니다.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인 장관청입니다.
동래구 수안동 동래교차로 근처에 있던 것을
1982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1982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송공단:
송상현을 비롯하여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을 모신 추념제단.
송상현을 비롯하여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을 모신 추념제단.
.
동래부동헌 : 독진대아문에 대한 해설중이십니다
동래부동헌 입구
.
.
부사 집무실...충신당.
.
박차정의사 생가
(1910년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은 동래구 출신의 한국의 독립운동가.
(1910년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은 동래구 출신의 한국의 독립운동가.
.
충렬사 입구에 배롱나무에 백일홍이 만발을 했습니다.
충렬사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
.
.
.
.
충렬사 후문 ~ 화목apt입구 ~ 학산여중고 후문~ 북장대로 가는 길..
.
.
.
인생문
이름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죽은 주검들을 성 밖 묘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문은 1731년(영조 7년) 새로 만든
동래읍성에 딸린 문으로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지만
임진왜란 때 억울하고 처절했던 조선 백성 사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이름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죽은 주검들을 성 밖 묘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문은 1731년(영조 7년) 새로 만든
동래읍성에 딸린 문으로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지만
임진왜란 때 억울하고 처절했던 조선 백성 사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
복천동 고분군으로 가는 이곳에 화장실이 있어
겸사해서 쉬어 가는 장소입니다.
겸사해서 쉬어 가는 장소입니다.
복천동고분군은 6세기 이전 부산 유일의 지배층 무덤으로,
가야 문화의 번성과 신라로의 편입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가야 문화의 번성과 신라로의 편입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올해는
배롱나무의 백일홍이 화려하게 피었습니다.
배롱나무의 백일홍이 화려하게 피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 너머 해넘이 풍경 ..
고분군에서 북장대로 가는 길
보라색 맥문동이 싱싱하게 만개를 하였습니다.
북장대에서의 석양 일몰..
.
.
북문..
북문과 서정대로 연결된 성곽길에도 조명이 들어왔습니다.
.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가파른 하산길
.
.
동래향교 도착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입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입니다
동래 항교에서 마무리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